한 개의 매장 속 1000개의 피규어숍 • 아스톱

May 25, 2021
한 개의 매장 속 1000개의 피규어숍 • 아스톱

백화점은 임대업입니다. 물건이 아니라 공간을 파는 이 모델을 백화점만 사용하란 법은 없습니다. ‘아스톱’이 소규모 매장에 백화점의 사업 모델을 적용했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을 보는 듯합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이 잃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오타쿠의 재발견’이라는 수확이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오타쿠에 대한 시선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폐인, 루저, 히키코모리 등 사회적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B급 문화를 탐닉하는 부류로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타쿠들의 소비력에 초점을 맞추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이들의 광적인 몰입은 아낌없는 소비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타쿠들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신인류로 거듭났습니다. 오타쿠 관련 시장 규모는 4000억 엔, 한화로 약 4조 5000억 원에 육박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섬세한 취향에 대응하기 위해 산업 전반이 진화를 거듭합니다. 그들의 덕력이 현재 만화, 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일본 소프트파워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고객을 대하다 보면 기준이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오타쿠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아키하바라였습니다. 한때 잘나가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는, 1990년대 들어 버블 붕괴와 함께 활기를 잃고, 전자제품 할인매장의 공세에 밀려 스러져가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하방선을 지켜준 게 오타쿠였습니다. 아키하바라는, 게임 출시일이 되면 가게 앞에 조용히 장사진을 이루고 단종된 제품은 몇 곱절의 프리미엄을 얹어서라도 손에 넣고야 마는 그들의 소비 패턴에 주목했습니다. 이에 피규어 숍, 망가 카페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마이너한 취향의 라인업도 강화했습니다. 이렇게 아키하바라는 오타쿠의, 오타쿠에 의한, 오타쿠를 위한 성지로 부활했습니다.

돈이 모이는 곳에 혁신이 있습니다. 단단한 팬심이 과감한 시도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줍니다. 매일 밤 아이돌 연습생의 공연을 볼 수 있는 AKB48 극장, 손님을 주인님으로 만들어주는 메이드 카페, 개인 소장의 휴대용 콘솔을 가져와 놀 수 있는 게임 집회소, 룸마다 다른 망가로 꾸며놓은 가라오케 등 흥미로운 콘셉트의 상점이 즐비합니다. 피규어숍도 빠질 수 없습니다. 피규어는 오타쿠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지갑도둑입니다. 소비가 아닌 소장용이고,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닌지라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가격대가 높습니다. 그렇다 보니 파는 쪽에선 기회 될 때마다 재고를 확보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재고 관리가 쉽지 않기에 그나마 특정 제품군만 큐레이션하는 것이 편집숍이 할 수 있는 최선처럼 보입니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가운데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승부하는 피규어숍이 있으니, 아키하바라 요지에 자리 잡은 ‘아스톱’입니다.

롱테일의 끝판왕

아스톱에 들어서면 일단 그 방대함에 압도됩니다. 바닥부터 머리 위를 넘겨서까지 상하좌우 빽빽이 피규어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건물 한 층의 절반을 통째로 쓰고 있지만, 이 중 동일한 피규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원하는 피규어가 있다면 수십 개의 버전에서 고를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보통 피규어숍은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데, 아스톱은 어떤 덕후가 오든 전천후입니다. 트레이딩 피규어(6~8개의 작은 피규어를 랜덤하게 넣은 피규어 박스), 갓샤폰(뽑기 방식의 캡슐 토이), 액션 피규어(관절이 있는 피규어), 스태추 피규어(장식용 피규어) 등 피규어 종류를 총망라하며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잡지, 영화 등 다양한 소스의 캐릭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프라모델, 로봇, 인형, 아이돌 포스터, 심지어 회중시계에 이르기까지 수집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찾을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보물섬을 발견하듯, 아스톱의 방대한 피규어 컬렉션에서 각자의 보물을 찾습니다.

상품보다 더 천차만별인 건 가격입니다. 본래 아키하바라에서는 발품이 진리라지만, 다른 매장과 비교를 하기 위함이지 한 매장 내에서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스톱에서는 비슷한 상품이어도 최대 1만 엔가량 차이가 납니다. 이쯤 되면 아스톱이 어떻게 이렇게 방대하고 다양한 컬렉션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 중고품 매장에 필수적인 상품 검수 절차는 어떠한지, 가격 결정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새로운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이메일을 남겨주세요. 세상의 앞선 생각을 업데이트해 드릴게요!
Great! Next, complete checkout for full access to 퇴사준비생의 여행.
Welcome back! You've successfully signed in.
You've successfully subscribed to 퇴사준비생의 여행.
Success! Your account is fully activated, you now have access to all content.
Success! Your billing info has been updated.
Your billing was not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