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를 세탁하는 세탁소 • 블랑

May 26, 2021
세탁소를 세탁하는 세탁소 • 블랑

친환경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친환경이 시장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용하기 불편하거나, 가격이 높거나, 오래 걸리는 등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런던의 친환경 세탁소 '블랑(Blanc)'은 친환경이 살아남는 법을 보여줍니다.

영국의 세탁소 고객들은 대부분 단골입니다. 동네마다 세탁소가 1개 있을까 말까하기 때문에, 세탁소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대안이 없어 단골이 됩니다. 2016년 기준으로 영국에는 세탁소가 3,000여 개 뿐입니다. 런던으로 지역을 좁히면 450여 개로 줄어듭니다. 영국보다 인구가 천만 명 이상 적은 한국에 30,000여 개에 육박하는 세탁소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치입니다. 영국은 미국에 이어 초기 코인 세탁소의 붐을 이끌었던 곳이기에 더욱 의아합니다. 1980년까지만 해도 영국에는 13,000여 개에 정도의 세탁소가 성업했습니다. 주거지 뿐 아니라 번화가 곳곳에 세탁소가 들어서 있어 도시 라이프의 한몫을 담당했습니다. 광고나 영화 촬영 현장으로 쓰일만큼 일상을 대변하는 이미지도 있었습니다. 세탁기가 사치품이던 시절, 세탁소는 간단한 세탁 기능을 대신하는 것만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전 국민의 97%가 세탁기를 소유하면서 세탁소는 급격히 설 자리를 잃습니다. 물론 세탁기 대중화가 비단 영국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국가의 세탁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제 살 길을 찾아 갑니다. 미국은 세탁소의 규모를 키워 단가를 낮추고, 고성능의 상업용 세탁기계를 들여 놓으면서 가정용 세탁기와는 다른 쓸모를 찾아 갔습니다. 한편, 일본이나 한국은 세탁소가 드라이 클리너로서 본격 자리매김합니다. '세탁 기술 전문가'로서 드라이 클리닝이나 고급 소재 세탁 위주로 역할을 철저히 분담한 것입니다. 반면 영국은 수도 요금, 전기 요금, 인건비, 임대료가 모두 높아 미국처럼 세탁소 운영 비용을 낮추기 어렵습니다. 또한 애초에 코인 세탁소 중심으로 업계가 편성되어 일본이나 한국처럼 드라이 클리너로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지도 못했습니다.
* 드라이 클리너: 세탁기술 전문가가 상주하며 고객의 세탁물을 맡아 세탁하는 세탁소. 이 외 세탁 기계를 설치해 고객이 스스로 세탁할 수 있는 코인 세탁소 타입(영국에서는 Launderette), 매장에서 세탁물을 받아 세탁 공장으로 보내 세탁하는 픽업 스테이션 타입이 있음.

그렇다고 세탁소가 과거의 유물로 남기에는 아직 때가 아닌 듯 합니다. 세탁소에 대한 잠재 수요는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런드랩(Laundrapp)의 사례에서 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런드랩은 스마트폰으로 세탁을 요청하면 원하는 시간에 방문 수거와 배달을 해주는 세탁 서비스입니다. 2014년에 런칭한 이후 3년 만에 영국 전역 100여 개 도시로 확장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탁소가 멀어서 이용하지 않았던 사람들, 코인 세탁소 등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웠던 사람들 등 잠재 고객들의 고충을 해결해 고객으로 흡수한 것입니다.

또다른 조짐과 징후들도 있습니다. 코인 세탁소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쓸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해 잠재 수요층을 공략하는 세탁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 카페 등과 결합해 마냥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사례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렇듯 영국에서 탈수 증상을 보이던 세탁소가 다시금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세탁소에 변화의 물결이 이는 가운데 ‘친환경’으로 승부수를 던지며 차별화되는 세탁소가 있습니다. 2013년에 문을 연 '블랑(Blanc)'입니다.

세탁소를 세탁하는 세탁소

블랑의 매장 전경입니다.

블랑은 밖에서 보면 세탁소라기보다 시크하고 깔끔한 부띠끄 살롱 같습니다. 내부는 가정집 거실처럼 꾸며 놓아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감각적인 공간 구성 덕분에 세탁소로서는 이례적으로 <보그(Vogue)>, <엘르(Elle)>, <베니티 페어(Vanity Fair)> 등 패션 잡지에 소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저 디자인이 세련된 세탁소에 그치지 않습니다. 런던의 유력 일간지 <이브닝 스탠다드(Evening Standard)>가 '런던 최고의 세탁소'로, 영국 세탁 협회가 주최한 <LCN 어워즈(Laundry and Cleaning News Awards)>에서 '2016년 가장 지속가능한 드라이 클리너'로 블랑을 꼽을 만큼 내실도 탄탄합니다. 블랑이 친환경을 전면에 내세우듯 세탁소에 친환경을 입히면 어떤 모습일까요?

세탁소는 옷을 깨끗이 하는 곳이지만, 정작 세탁소 자체는 그닥 깨끗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 영세한 개인 사업자라서 브랜드랄 것이 없고 간판이나 외양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작업 현장도 그대로 노출됩니다. 천장까지 빼곡히 걸린 옷 가지들과 칙칙 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더운 증기가 세탁소를 채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탁소 특유의 기름 냄새가 있습니다. 세탁소에 방문했을 때는 물론이고 맡긴 옷도 세탁소 냄새에 젖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깨끗이 세탁된 징표라 여길 수 있지만, 없으면 더 좋은 냄새입니다.

세탁소 냄새는 드라이 클리닝에 쓰이는 용제인 퍼클로에틸렌(Perchloroethylene, 이하 퍼크) 때문에 납니다. 그런데 이 퍼크는 미국, 프랑스, 덴마크 등 일부 국가에서는 사용을 원천 금지합니다. 정화 장치 없이 공기, 물, 흙 등으로 배출되면 환경에 해를 끼치고, 사람이 증기에 노출될 경우 발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명확한 금지 규제가 없는 지역에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관행적으로 퍼크를 사용합니다.

블랑은 퍼크를 쓰지 않습니다. 사실상 드라이 클리닝 방식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대신 '웻 클리닝(Wet Cleaning)'을 합니다. 기름 대신 물로 세탁하는 것입니다. 물에 자연분해되는 세제와 웻 클리닝 전용 세탁 기계를 쓰고, 30도 정도의 저온을 유지해 에너지를 절약합니다. 드라이 클리닝으로 할 수 있는 세탁은 웻 클리닝으로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 블랑의 지론입니다. 지용성 얼룩은 국소 부위만 기름을 써 애벌 빨래로 지우고, 원단에 따라 물의 온도와 양, 세제의 종류, 세탁 및 건조 시간 등을 적절히 조절하면 웻 클리닝으로 드라이 클리닝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웻 클리닝으로 세탁을 하면 색과 형태가 변하는 등의 세탁 사고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게 다루기 때문에 오히려 옷이 한결 산뜻하고 부드러워집니다. 기름 냄새가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새로운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이메일을 남겨주세요. 세상의 앞선 생각을 업데이트해 드릴게요!
Great! Next, complete checkout for full access to 퇴사준비생의 여행.
Welcome back! You've successfully signed in.
You've successfully subscribed to 퇴사준비생의 여행.
Success! Your account is fully activated, you now have access to all content.
Success! Your billing info has been updated.
Your billing was not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