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계의 파타고니아를 꿈꾸다 • 이튼 호텔

Mar 28, 2021
호텔계의 파타고니아를 꿈꾸다 • 이튼 호텔

호텔의 공용 공간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가운데 홍콩에 끝판왕이 있습니다. 이튼(Eaton) 호텔의 공용 공간은 대형 푸드 코트, 코워킹 스페이스, 갤러리, 공연장, 라디오 방송국, 영화관 등으로 호텔이라는 걸 깜빡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투숙객은 물론 투숙하지 않는 여행자와 현지인이 한 데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트 위크를 열어 로비에서 행위 예술을 하질 않나, 공중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로 라디오를 녹음하고, 컨퍼런스룸에서는 난민이 큐레이션한 옷으로 패션쇼를 엽니다.

사실 이튼은 사회운동가가 만든 호텔입니다. 이튼이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가는지, 이를 위해 어떻게 밀레니얼들에게 어필하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호텔계의 파타고니아'의 탄생을 기대해볼 만 합니다.

마천루를 만든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호텔이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마지막 작품인 330 노스 와바시입니다. 그가 무려 1920년에 마천루 계획안에서 제안한 커튼 월 공법은 건설 자재가 적게 들어 고층 건물을 빠르게 지을 수 있습니다. 현대 도시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Jeffery Howe, Bluffton University

시카고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1969년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설계한 작품이 있습니다. 330 노스 와바시(330 North Wabash) 빌딩입니다. 말년의 작업이니만큼 'less is more'라는 그의 건축 철학이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알루미늄 철제와 유리만으로 짓고, 각각 검은색과 진회색으로 입면의 색감을 통일해 단정하고 매끈합니다. 덕분에 뼈대와 창문 간에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고 단일한 개체로 인식됩니다. 단순 명료함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40여 년간 IBM 본사로 쓰이던 330 노스 와바시는 홍콩의 부동산 재벌인 로 카 수이(Lo Ka-Shui)를 새 주인을 맞아들입니다. 그는 이 곳을 5성급 호텔 랭햄 시카고(Langham Chicago)로 탈바꿈하기로 합니다. 이로써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최초이자 유일한 호텔이 탄생했습니다.

로비 내부에도 커튼 월 구조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랭햄 시카고

사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마지막 작품이 호텔로 바뀐다는 소식에 건축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재료와 구조로 만드는 모더니즘 건축물에 장식적인 럭셔리 호텔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2013년 새단장을 마친 랭햄 시카고 호텔에는 거장에 대한 존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기존 건축 구조의 취지를 지키며 장점으로 승화하고, 단순 명료한 외피와 어울리도록 최대한 '절제'된 럭셔리로 내부를 채웠습니다. 이를테면 300여 개의 객실 모두가 통유리로 전망을 즐길 수 있게 했는데,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일체형 판유리로 된 커튼 월(Curtain wall) 구조의 장점을 잘 살린 결과입니다. 여기에 미스의 손자 더크 로한(Dirk Lohan)도 리노베이션 과함에 참여합니다. 더크는 당시 할아버지를 도와 설계부터 시공까지 마무리했던 장본인으로 미스가 의도한 건축 방향성을 체화하고 있어 정통성이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기존 건축 기조에 무리한 변형이 없는지 감리하고, 곳곳에 미스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었습니다. 미스가 딸을 위해 만든 소파와 의자를 복각해 로비에 비치하고, 철과 유리 외에 미스가 애용하던 내장재인 트래버틴(Travertine, 대리석의 한 종류)으로 동굴 같은 이색적인 욕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미스의 손자인 더크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 있습니다. 바로 로 카 수이의 딸인 캐서린 로(Katherine Lo)입니다. 예일대에서 인류학 공부를 마치고 서던 캘리포니아대에서 영화를 만들며 예술과 문화를 탐닉하는 데 여념이 없던 캐서린은 원래 아버지가 하는 럭셔리 호텔 비즈니스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즈니스 논리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이력도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학교 기숙사에 미국 국기를 거꾸로 게양해 징계를 받고, 한국 농부들이 홍콩에 와서 WTO에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영화학도인만큼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어떻게 호텔로 재탄생하는지 영상으로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은 다큐멘터리 제작 차 리노베이션 내내 함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호텔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서린은 몰랐습니다. 이 경험이 패밀리 비즈니스에 한 발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요.

트로이 목마가 된 호텔

"홍콩에 있는 이튼 호텔을 너가 바꿔볼래?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로 말이야."

랭햄 시카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시 영화판에 돌아간 캐서린에게 아버지가 또 다른 제안을 합니다. 이번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거장의 건축물이 아닙니다. 1999년 지은 홍콩의 4성급 비즈니스 호텔, '네이선 로드(Nathan Road)에 그 오래된 거(that old thing) 있잖아'라고 하면 모두 아는 이튼 호텔을 다시 여는 일입니다. 에어비앤비나 호스텔이 급부상하는 시대에 랭햄 호텔과 같은 초럭셔리 라인 외에도 대항마가 필요했던 터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거절할 캐서린이지만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이 어쩐지 남다르게 들렸습니다. 밀레니얼이 베이비붐 세대 이후 가장 유망한 소비층이어서가 아닙니다. 캐서린은 밀레니얼이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변화에 유연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66%의 밀레니얼들이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할 의사가 있음을 밝힐만큼 밀레니얼들은 보다 의식적이고 윤리적인 소비를 지향합니다. '사회적 임팩트'가 구매를 결정할 때 주요한 고려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밀레니얼을 제대로 타깃한다면 어쩌면 캐서린이 바라는 사회적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텔을 목표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패션이나 F&B 업계에서는 파타고니아, 홀푸드 등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선도 기업들이 있는데 호텔업에서는 이런 역할을 해줄 규모 있는 기업이 없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은 '호텔계의 파타고니아'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아버지의 제안에 응했습니다. 그렇게 4년에 걸쳐 준비한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이 이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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