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격 할인의 정석

Jun 2, 2021
[에세이] 가격 할인의 정석

#랄프스 #근거 있는 저렴함 #물 사기까지 걸린 시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을 파는 곳을 찾기 위해 구글맵을 켜야 했던 것입니다. 물을 사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물을 사려고 주변을 돌았습니다. 스테이플스 센터가 다운타운에 있으니 당연히 물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이나 마트가 곳곳에 있을 줄 알았습니다. 조금만 걷다 보면 편의점이나 마트가 보이겠거니 했는데, 웬일인지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호텔로 복귀해서 사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호텔 근처에서도 물을 사려면 꽤 걸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호텔에서 사기도 애매했습니다. 물값이 아깝기도 했고, 물뿐만 아니라 과일이나 간식거리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구글맵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구글맵을 켜니, 한참 동안 헤맨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던 구역에는 실제로 편의점이나 마트가 없었습니다. 그 방향으로 더 갔다면 물 사러 가다가 탈진했을 수도 있을 만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지도를 보니 방향을 틀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5분을 더 걸어야 가장 가까운 마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10분을 더 걸으면 유기농 마켓인 홀푸즈(Whole foods)가 있었지만, 스테이플스 센터 주변에서 이미 10분 이상 맴돈 상황이라 5분의 거리도 길어 보였습니다. 홀푸즈까지 걷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 새로운 곳에 구경도 갈 겸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트인 ‘랄프스(Ralphs)’로 갔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범상치 않은 포스를 감지합니다.

‘Fresh fare’  

랄프스가 내 건 슬로건입니다. 신선한 제품이 아니라 신선한 가격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가격 경쟁력으로 존재감을 찾겠다는 뜻입니다. 가격이 쌀 거라는 예상을 하고 매장을 들어서니,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곳곳에 가격을 할인하는 이유가 붙어 있었습니다. 최저가 보장으로 고객들을 안심시키기 보다, 이유가 있어서 싸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을 사러 갔는데, 할인의 기술이 눈에 보이니 물 사려는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 버렸습니다. 지금부터 마트를 둘러보며 랄프스의 근거 있는 저렴함을 알아보겠습니다.  

매장 밖에서 할인한다

랄프스 매장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팝업 사이니지가 있습니다. 주유할 때 갤런 당 최대 1달러까지 할인해 준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마트 내에 주유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정유사인 ‘쉘(Shell)’과 제휴해 마트에서 적립한 포인트로 셀 주유소에서 할인받을 수 있게 만든 프로모션입니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기본적으로 마트에서 제품을 구매하면 1달러 당 1연료 포인트를 적립해 줍니다. 포인트가 누적되어 100연료 포인트 이상이 모이면, 그때부터 100연료 포인트 씩을 차감하여 갤런 당 10센트 씩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00연료 포인트를 사용할 경우 갤런 당 10센트를, 200연료 포인트를 쓰면 갤런 당 20센트를, 1,000연료 포인트를 차감할 때는 갤런 당 1달러를 아낄 수 있는 식입니다. 갤런 당 최대 1달러까지 할인해 준다고 했으니 1,000연료 포인트가 주유 할인폭의 최대치입니다.

할인폭이 적립 포인트에 비례해서 커지니 명목상 적립률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유하는 양이 늘어나면 실질적 적립률이 커집니다. 예를 들어, 주유할 때 10갤런을 채운다고 가정하고 할인을 위해 100연료 포인트를 쓸 경우에는 주유비를 1달러만큼 아낄 수 있습니다. 100연료 포인트가 있다는 건 마트에서 100달러어치를 구매했다는 뜻이고, 이에 대해 1달러의 주유비를 절약할 수 있으므로 1%를 적립한 셈입니다. 이때 10갤런이 아니라 20갤런을 주유하면 2달러를 절감할 수 있어 적립률이 2%로 높아집니다. 한 번의 주유에 최대 35갤런까지 할인받을 수 있으니 혜택을 꽉 채워 이용하면 3.5달러까지 절약할 수 있고, 이는 구매 금액의 3.5%에 해당하는 적립률입니다.

이처럼 고객의 혜택이 커지면 쉘은 손해를 보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유소 입장에서는 갤런당 할인폭이 일정해 할인율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고객이 한 번에 주유를 많이 하면 할인 금액은 커지지만, 그만큼 비례해서 매출이 늘어나니 주유소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입니다. 랄프스 입장에서도 손해가 아닌 건 마찬가지입니다. 쉘과 마케팅 제휴를 한 거라 포인트 차감에 따른 할인 금액을 액면 그대로 보전해 주진 않을 테니까요.

고객은 적립률이 높아지고, 쉘은 고객 방문을 유도할 수 있으며, 랄프스는 적립 혜택을 통해 매출을 늘릴 수 있으니, 모두가 만족스러운 할인 방식입니다. 포인트 사용을 마트 내로 한정하지 않고, 제휴 업체로 확장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광고 매대라서 할인한다

특정 브랜드 제품을 별도의 매대에서 판매하거나 눈에 띄게 진열하면 주목도가 높아져 판매량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유통 업체 입장에서는 공급 업체에 목 좋은 매대를 내주면서 광고비를 받는 비즈니스 모델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국내 서점 등에서 광고 매대임을 밝히고 책을 별도의 매대에 진열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랄프스에서도 광고 매대임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푯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소비자들에게 광고 매대라는 것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어 표시를 해 둔 이유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광고 매대이기 때문에 더 싸게 판다는 것입니다. 광고비를 받았으니, 그만큼 제품 가격을 할인해서 고객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입니다.

랄프스 입장에서는 공급 업체에서 받는 광고비가 추가 수익일 텐데, 이를 챙기지 않고 가격 할인에 활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고객 만족을 높인다는 목적이 크겠지만, 가격 할인을 하면 고객뿐 아니라 공급 업체, 그리고 랄프스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의 총합이 커질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광고 매대를 별도로 구성할 경우 주목도가 높아져 판매가 늘어나는데, 여기에 가격 할인까지 더하면 추가적인 매출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격 탄력성이 높은 제품일 경우 효과가 더 큽니다. 고객은 제품을 싸게 살 수 있고, 공급 업체는 광고 효과를 볼 수 있으며, 랄프스는 매출을 높일 수 있으니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윈윈(Win-Win)할 수 있는 할인 방식입니다.

행동하는 고객에게 할인한다

랄프스 매장을 둘러보다 보면 특정 매대 앞에 쿠폰 발급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센서에 손을 갖다 대면 1달러 할인 쿠폰을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쿠폰에 적혀 있는 ‘유니레버(Unilever)’ 제품이 할인 대상입니다. 아마도 유니레버가 할인을 지원하는 프로모션인 듯합니다.

그냥 팝업 사이니지로 1달러 할인을 표시해두어도 될 텐데 굳이 쿠폰 발급기를 설치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발급기가 매대에서 툭 튀어나와 있어 제품의 주목도를 높이는 효과와 고객의 행동을 유도하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격 차등화를 통해 고객 만족과 판매 수익을 동시에 챙기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팝업 사이니지를 걸어 제품 자체에 대해 1달러를 할인해 준다면, 가격 할인과 관계 없이 구매할 의사를 가진 고객까지도 할인해 주게 됩니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할인 금액만큼 수익이 줄어듭니다. 반면 쿠폰 발급기를 설치해 쿠폰을 발급받은 고객들만 할인해 줄 경우, 가격에 민감한 고객에게는 할인 혜택을 제공해 구매 전환율과 만족도를 높일 수 있고, 동시에 가격에 덜 민감해 쿠폰 발급기를 그냥 지나치는 고객들에게는 정가를 받을 수 있어 마진을 줄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현장에서 출력하는 쿠폰 외에 디지털 쿠폰도 활용합니다. 랄프스는 매주 금요일마다 ‘Free Friday Download’라는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하는데, 이때 랄프스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하면 랄프스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제품의 디지털 쿠폰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2.5달러에 판매되는 에너지바를 공짜로 나눠주는 식입니다. 현물로 할인을 해주는 셈이므로 가격 혜택에 민감한 고객의 매장 방문을 유도할 수도 있고, 고객 만족도도 높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고객이 아니라 행동하는 고객에게만 할인을 해주는 건 랄프스 입장에서도 이득입니다. 가격 차등화를 통해 고객을 구분함으로써 매출과 이익을 동시에 올릴 수 있으니까요.    

못 파느니 할인한다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들과 달리 농장에서 재배하는 과일이나 채소는 모양이나 크기가 균일하지 않습니다. 같은 농장에서 동일한 시기에 생산했다 하더라도 생김새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먹음직스러운 과일이나 채소가 우선적으로 팔리고 흠집이 났거나, 사이즈가 작거나, 모양이 특이한 과일과 채소는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과일과 채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김새가 못났을 뿐 신선함, 영양가, 맛 등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랄프스에서는 생김새 때문에 안 팔릴 가능성이 높은 제품을 할인해서 판매합니다. 매장 입장에서는 못 파는 것보다 할인해서라도 파는 게 낫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만큼이나 언제 생겼는지도 할인의 이유가 됩니다. 랄프스 매장의 와인 매대에서는 ‘빠른 판매를 위한 할인(Reduced for quick sale)’이라는 푯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와인은 기본적으로 유통기한이 없고 숙성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데 빨리 판매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와인 레이블에서 빈티지를 찾을 수 없거나 NV(Non-vintage)로 표기된 와인은 오래될수록 맛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와인에는 포도가 생산된 해를 적어두는데 관련한 표기가 없다면 여러 포도를 섞어 만든 와인이라 빨리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할인을 해서라도 빨리 소비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어울리는 조합으로 할인한다

랄프스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의 가격 할인을 합니다. 개당 1.49달러인 우유를 10개 구매할 경우 약 33% 할인해 10달러에 판매하거나, 스타벅스 커피 패키지를 맛을 달리하여 2 팩 고르면 17.5% 할인해 주는 식입니다. 묶음으로 할인해서 판매하는 방식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랄프스에서는 이를 고도화한 방식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750ml짜리 와인을 6병 사고 식료품 코너에서 35달러어치를 구매하면 12달러를 할인해 주는 프로모션이 대표적입니다. 대량 구매에 대한 할인이라는 점에서는 묶음 판매와 비슷하지만, 동일 제품군이 아니라 카테고리가 다른 제품군을 연결해 할인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특히 고객의 구매 목적을 고려했기에 더 주목할 만합니다. 고객이 와인을 6병 구매 한다는 것은 혼자 시간을 두고 마시거나, 여럿이 파티를 하며 마시는 경우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자의 경우야 식료품 코너에서 35달러어치의 안주를 구매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는 다릅니다. 파티 참여자 수를 고려해 안주를 장만하다 보면 35달러를 훌쩍 넘길 수 있어 가격 할인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자주 오도록 할인한다

랄프스에서 판매하는 꽤 많은 제품에 이원화된 가격표가 붙어있습니다. 한눈에 크게 들어오는 가격이 할인된 가격이고, 그 옆에 조그마한 크기로 적혀 있는 금액이 정상가입니다. 할인폭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 차이가 있지만, 랄프스의 리워드 카드가 있어야 할인가를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건부의 가격 할인이라면 정상가를 크게 적어두고 할인가를 작게 표시해야 고객에게 혼선을 주지 않을 텐데 반대로 한 이유가 있을까요?

리워드 카드를 조건 없이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격 할인을 받으려면 리워드 카드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누구나 연회비 등의 비용 없이 리워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어서 사실상 모든 고객이 할인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눈속임을 하려고 할인된 가격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리워드 카드의 혜택을 실감할 수 있도록 할인가를 크게 붙여 놓은 것입니다.

고객을 호도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영수증에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리워드 카드를 발급하지 않고 정상가로 계산하면, 리워드 카드를 발급받았을 때 할인받을 수 있는 금액을 영수증에 보여주고 추후에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당 금액만큼의 쿠폰을 지급합니다. 직접 할인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구매 금액의 일정 비율을 적립해 주는 것과 비교했을 때 차원이 다른 혜택입니다.

고객 입장에서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랄프스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장사 아닐까요? 단 건의 거래에서는 마진이 줄어들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는 남는 장사입니다. 랄프스 카드를 발급받아 혜택의 달콤함을 맛본 고객들은 향후에도 랄프스를 방문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고객 생애 가치(Customer lifetime value)로 보면 랄프스에게도 이득입니다. 리워드 카드를 발급받지 않은 고객들에게까지 영수증에다가 굳이 쿠폰을 발급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수증에 쿠폰을 남겨 두니 고객들에게 매장을 다시 찾을 이유가 생깁니다.

물을 사러 갔을 뿐인데, 할인의 이유를 디코딩하다가 랄프스 매장에서 한 시간 반이나 있었습니다. 5분을 더 걷기가 힘들어 홀푸즈 매장에 가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뤘지만, 설득력 있는 할인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체력 소모로 평소보다 더 많은 물을 산 건 물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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