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눈높이를 맞추는 배려의 클래스

Jun 2, 2021
[에세이] 눈높이를 맞추는 배려의 클래스

#소리의 정체 #사회적 약자 #동등한 대우

로스앤젤레스에서 탔던 엘리베이터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모든 엘리베이터는 아니었지만, 여러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층간 이동을 할 때 ‘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층이 높아질 때도, 반대로 낮아질 때도 층을 지날 때마다 의도적으로 발신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대의 엘리베이터에서 난 소리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여러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나니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있던 팀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나는 현상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내 나름의 답을 찾았습니다. 층을 확인할 수 없는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층을 지나칠 때마다 소리로 알려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로스앤젤레스를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약자의 입장을 고려할 정도니, 도시 곳곳에 약자를 배려한 장치가 있을 거란 가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 머무르는 동안 약자의 눈높이에 맞춘 배려를 찾아보았습니다.

해변에서 발견한 배려

하루는 짬이 나 로스앤젤레스의 바닷가에 갔습니다. 바다를 감상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해변을 따라 구축되고 있는 실리콘 비치(Silicon beach)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실리콘 비치는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스타트업들이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곳을 말합니다. 실리콘 비치의 대표격인 ‘베니스 비치(Venice beach)’에 갔으나, 실리콘 밸리와 같은 분위기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실리콘 밸리처럼 주요 기업들의 캠퍼스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아직은 그 정도의 생태계를 갖춘 건 아니었습니다. 스타트업 관계자가 아니라면 실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실리콘 비치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바닷가에 간 김에 바람도 쐴 겸 바다 위로 다리를 놓아 만든 전망대를 산책했습니다. 전망대 끝까지 가서 바다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즐기고 있는데, 장애인 표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직감적으로 약자를 배려한 장치가 있을 거란 생각에 주변을 살펴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애인 표시가 있는 곳에는 난간의 일부를 없애 놓았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면 난간이 시야에 걸려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를 배려한 결과입니다.

마트에서 발견한 배려

‘가격 할인의 정석’에서 랄프스 매장의 인사이트를 공유했었는데, 이곳의 매력은 가격 할인의 정석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판매하는 방식에서도 고객 관점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과일을 파는 매대에서는 과일을 먹을 때 도움이 되는 도구를 함께 진열해 판다든지, 야구 경기를 보면서 먹기에 적합한 견과류에는 ‘LA 다저스’ 풍선을 매달아 놓는다든지, 바나나를 묶음이 아니라 낱개로 가져갈 수 있는 코너를 둔다든지, 채소에 주기적으로 물을 뿌려 신선함을 유지하는 식입니다.

마트를 둘러보며 충분한 영감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계산대 앞에서 또 한 번 눈이 뜨입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위해 계산대의 일부를 낮춰 놓았습니다. 약자를 위한 계산대를 따로 구분해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산대를 약자와 함께 쓸 수 있도록 만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장애인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뜻입니다.

호텔에서 발견한 배려

로스앤젤레스의 다양한 빌딩을 드나들면서 특징적인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빌딩과 달리 회전문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처럼 사시사철 날씨가 화창하고 기온 변화가 크지 않은 환경에서는 굳이 회전문을 만들어 건물 밖의 바람을 차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전문이 없는 것만큼이나 자동문이 열리는 방식도 특징적이었습니다. 많은 자동문이 미닫이 방식이 아니라 여닫이 방식으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닫이문의 손잡이를 살짝 밀어야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반자동문인 셈인데, 자동문치고는 문을 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스테이플스 센터 근처에 위치한 감각 있는 호텔의 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휠체어를 탄 사람들의 불편함을 고려해, 문을 밀지 않고도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눌러 문을 열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쉽게 호텔을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특히 문이 열리는 방향 쪽에 있는 버튼은 문의 폭을 고려해 거리를 두어 설치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튼을 눌렀을 때 문과의 부딪힘을 피하기 위해 휠체어를 뒤로 이동시켜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 버튼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약자의 입장에 서서 고민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할리우드와 비버리힐즈로 대표되는 로스앤젤레스라 유명인이나 부자들을 위한 도시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려는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선입견이 바뀐 것은 물론입니다. 차별하여 대우하기보다, 동등하게 대우하기에 더 바람직한 배려의 기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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