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원짜리 책을 200만 원에 파는 서점 • 골즈보로 북스

May 26, 2021
2만 원짜리 책을 200만 원에 파는 서점 • 골즈보로 북스

제품에 스토리를 입히면 가치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제품 자체가 스토리인 책은 예외인 듯 보입니다. 같은 장르의 책이라면 가격대가 정해져 있습니다. 책이니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골즈보로 북스’가 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습니다.

배에 술을 태우고 세계일주를 합니다. 수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조하려는 목적입니다. 노르웨이의 전통주 아쿠아비트(Aquavit)를 만드는 브랜드 리니(Linie)는 4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35개국을 떠돌아 다니며 셰리통에 채운 술을 숙성시킵니다.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온 전통의 숙성방법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주조 기술이 발달하여 더 저렴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리니 아쿠아비트의 제조 방식은 창의적 기획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의 산물입니다. 시작의 역사는 18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무역상이 아쿠아비트를 팔기 위해 인도네시아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옵니다. 팔지 못한 술을 버릴 수는 없어 사람들과 나눠 마셨는데, 이상하게도 아쿠아비트의 맛이 향상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양조장에서 여러 시도를 하며 맛을 재현해봤으나 비슷한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법을 찾을 수 없어 배를 다시 띄워 제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는 성공한 셈입니다.

아쿠아비트는 세계일주를 하고 나면 더 맛있어집니다. 북유럽에서 출발해 적도를 두 번 지나는 동안 온도의 변화에 따라 숙성되고 파도의 리듬에 따라 풍미가 생깁니다. 게다가 바다를 가로지른 시기에 따라 온도와 파도에 차이가 있어 술맛이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품질 관리가 어렵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일한 맛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면 서로 다른 배를 타고 각자의 길을 떠난 술들은 자연스레 한정판이 됩니다. 한때 리니 아쿠아비트는 이 숙성 방법을 비밀에 부쳤으나 이제는 모든 라벨에 항해 일지를 표기해 스토리로 풀어냅니다. 알코올뿐만 아니라 스토리까지 담아 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스토리가 알싸한 전통의 방식을 고수한 덕분에 리니 아쿠아비트는 보통의 아쿠아비트보다 가격이 높습니다. 노르웨이 아쿠아비트 주요 브랜드들의 가격을 비교해보면, 보통 용량인 0.7리터의 경우 뢰이텐(Løiten)이 약 6만 9,000원, 길드(Gilde)가 약 6만 2,000원, 아틀룽스타드(Atlungstad)가 약 6만 8,000원으로 고만고만합니다. 반면 리니 아쿠아비트는 약 7만 4,000원으로 주요 브랜드들의 평균 대비 12%가량 높습니다. 제조 원가의 요소가 반영된 부분도 있겠지만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끌어올린 가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조 원가만 고려해 가격을 올렸다면 고객들의 지불 가치 수준을 높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리니 아쿠아비트의 사례처럼 약간의 스토리를 추가하는 것으로도 제품의 가치가 달라지는데, 제품 자체가 스토리인 책은 예외인 듯 보입니다. 같은 장르의 책이라면 가격대가 정해져 있습니다. 스토리의 흥미진진함, 저자의 유명세, 제작 과정의 비화 등은 가격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장르의 가격대를 뛰어 넘는 값을 받을 수 있는 책은 두꺼운 책뿐입니다. 책이니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런던의 ‘골즈보로 북스(Goldsboro Books)’ 서점은 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서명받은 초판을 파는 책방

런던을 더 낭만적으로 만드는 건 거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책방들입니다.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불리는 돈트 북스(Daunt Books), 영국 왕실에 도서를 납품하는 해차드(Hatchards), 개인 서재 컨설팅인 비스포크 서재 서비스로 유명한 헤이우드 힐(Heywood Hill), 20세기 여류 작가들의 책을 판매하는 페르세포네 북스(Persephone Books), 만화 장르에만 집중하는 고쉬(Gosh), 요리 관련 책 전문 서점인 북스 포 쿡스(Books for Cooks) 등 저마다의 뚜렷한 개성을 분위기 있게 드러냅니다.

골즈보로 북스 매장 전경입니다. 런던의 고서적 거리인 세실 코트에 위치해 있습니다.

런던 거리를 런던답게 만드는 서점들 중에서도 특히 더 호기심이 생기는 곳이 골즈보로 북스입니다. 고서적 거리인 세실 코트(Cecil Court)에 위치한 이 작은 책방은 컨셉이 분명합니다. 서명받은 초판을 팝니다. 저자의 사인을 스캔해 인쇄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직접 서명한 책들입니다. 저자의 타계 등으로 서명을 받을 수 없는 경우는 초판을 구해서 매대에 진열해 둡니다.

컨셉은 분명했지만 1999년에 오픈한 상대적으로 젊은 서점이 고서적 거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서점을 연지 14년 만에 골즈보로 북스가 주목을 받는 계기가 생깁니다. 골즈보로 북스의 주인은 로버트 갤브레이스(Robert Galbraith)가 쓴 《쿠쿠스 콜링(The Cuckoo’s Calling)》이라는 소설의 높은 완성도를 눈여겨봤고,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판단해 250권의 책에 저자 사인을 받아서 보내달라고 출판사에 요청합니다.

추리 소설인 《쿠쿠스 콜링》은 스토리에 반전이 있는 건 물론이고, 소설책 자체에도 반전이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해리 포터(Harry Potter)》를 쓴 J.K. 롤링(J.K. Rowling)이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로 그녀가 유명세에 기대지 않고 스토리만으로 승부하기 위해 쓴 책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바뀐 게 없지만, 진짜 저자가 드러나자 16.99파운드(약 2만 5,000원)였던 초판 서명본은 가치가 100배 이상 뛰어 1,750파운드(약 263만 원) 정도에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골즈보로 북스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쿠쿠스 콜링》의 초판 서명본을 250권이나 보유하고 있었으니 대박이 났을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습니다. 골즈보로 북스는 폭등하는 시세를 따르지 않고, 《쿠쿠스 콜링》 초판 서명본을 서점 및 직원 소장용으로 4권만 남겨둔 채 처음 가격 그대로인 16.99파운드에 팔았습니다. 진짜 저자가 알려질 당시 재고 수량이 100권만 있었다고 가정해도 2억 6,000만 원 상당을 포기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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