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을 내세우지 않는 홍콩 최고의 채식 레스토랑 • 그래스루츠 팬트리

May 28, 2021
채식을 내세우지 않는 홍콩 최고의 채식 레스토랑 • 그래스루츠 팬트리

홍콩에는 분명 채식 레스토랑인데 채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레스토랑 '그래스루츠 팬트리(Grassroots Pantry)'가 있습니다. 매장 설명에서 채식 관련한 표현은 없다시피 합니다. 모든 메뉴가 채식 단계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다는 비건(vegan)을 따르고 있고, 한 설문조사에서 아시아 채식 레스토랑 1위를 차지했는데도 말입니다. 드러내놓고 자랑할 법도 한데 왜 채식을 강조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래스루츠 팬트리는 스스로를 어떤 레스토랑으로 정의하고 있을까요?

세계 1위의 장수 국가는 어디일까요? 100세 넘는 인구가 가장 많다는 일본이나 산 좋고 물 좋은 지중해 연안의 어딘가를 떠올릴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 홍콩이 최장수국입니다. 2016년 세계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홍콩의 평균 기대 수명은 84.23세로 일본의 83.98세보다 앞섭니다. 사람들이 잘 몰랐을 뿐 지난 10년간 홍콩은 전 세계 장수국 10위권 밖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영토 10%에 인구 절반이 사는 초고도 인구밀도에 콘크리트 정글 등 분명 장수에 최선은 아닌 환경 속에서 홍콩 사람들이 오래 사는 비결이 궁금해집니다.

홍콩 사람들이 오래 사는 건 정부의 노인 대상 복지 정책 확대, 걷기에 최적화된 생활 환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특유의 식습관도 한 몫 합니다. '약과 음식은 그 근원이 같다', '음식이 곧 약이다'라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 홍콩식 식습관의 핵심입니다. 홍콩인들은 몸에 좋은 음식을 의식적으로 찾아 먹음으로써 식사로 병을 예방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다보니 홍콩의 국민 음식은 실제 한약재를 넣은 것이 많습니다. 홍콩의 아침 식탁에 빠지지 않는 스프 리탕, 푹푹 찌는 무더위를 이열치열로 다스리는 한방차 량차, 심지어 길거리 음식에도 한약재를 넣을만큼 한약재는 홍콩인들에게 친숙한 식재료입니다. 길을 걷다보면 한약방이나 약재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건 기본입니다. 꼭 한약재까지 가지 않더라도 생선이나 닭은 갓 잡거나 살아있는 것을 선호하고 그날 먹을 분량의 식재료만 소량 사가는 등 재료의 신선함에 집착하는 것도 음식을 대하는 남다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약식동원의 식문화와 채식이 만나니 시너지가 폭발합니다. 홍콩은 한때 인당 육류 소비량이 연 140kg에 육박하며 세계 제일의 육식 애호국에 등극하는 등 채식과 가장 거리가 먼 도시였습니다. 과거에는 고기 살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채식이었던지라 비싼 고기가 더 몸에 좋다고 생각하고 채식이 건강식이라는 인식이 약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종교적 신념, 동물 권리 보호, 환경 보존 등의 이유로 채식을 하지만, 홍콩인에게 채식은 건강 식단으로서의 의미가 큽니다. 채식은 심혈관 질환을 예방하고, 암과 당뇨 발생률을 낮추며, 체중 관리에 도움이 되는 등 정말 '약'처럼 기능한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번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자 홍콩의 채식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17%가량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2018년 기준으로 홍콩 인구의 22%가 부분적 채식을 실천하고 있으며 고도 육식 애호가의 비중은 4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이러한 홍콩 채식 시장의 잠재력을 전 세계에서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가 투자한 식물성 대체 단백질 개발사 비욘드 미트(Beyond Meat)는 식물성 패티로 만든 비욘드 버거(Beyond Burger)의 첫 번째 해외 진출지를 홍콩으로 정했고, 영국의 샌드위치 전문점 프레따 망제(Pret a Manger)도 채식 샌드위치 브랜드 베지 프레(Veggie Pret)를 홍콩에서 최초로 선보이기에 이릅니다. 지금 홍콩의 외식계에서 채식은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습니다.

이렇게 홍콩이 채식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가운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핫한 채식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2012년 문을 연 홍콩의 그래스루츠 팬트리(Grassroots Pantry)입니다. 빅 7 트래블(Big 7 Travel)이 전 세계 150만명을 대상으로 설문해 아시아 1위, 전 세계 8위 채식 레스토랑으로 그래스루츠 팬트리를 선정했고, 홍콩의 유력 매거진 홍콩 태틀러(Hong Kong Tatler)가 2018년 최고의 지속가능성 챔피언(Sustainability Champion)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는 그래스루츠 팬트리를 채식 레스토랑으로 소개하지만 정작 그들 스스로는 채식을 공공연하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채식 메뉴를 일부 포함하고 있는 반쪽짜리 채식 레스토랑과 달리 모든 메뉴가 철저하게 비건(vegan)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홍콩 전역을 휩쓸고 있는 채식 트렌드에 올라탈 법도 한데 그래스루츠 팬트리가 채식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초심자용 - 채식이 아닌 '건강식'으로 승부하기

그래스루츠 팬트리는 홍콩인들의 약식동원 사상을 정확히 조준합니다. 신선하고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로 '치료하는 음식(food that heals)'을 만들 것을 약속합니다. 이를 위해 양질의 식재료를 공수함은 물론 식재료의 영양을 보존하고 최적화하기 위해 저온 조리, 콜드 프레스, 건조, 발효, 글루텐 프리 등 15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조리 방식을 하나하나 메뉴판에 기재할만큼 열성입니다. 채식은 이러한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 비건 요리 그 자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스루츠 팬트리의 비전을 보면 그들의 지향점이 좀 더 분명해집니다. 'To make food do good', 즉, '음식이 좋은 일을 하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메뉴판과 홈페이지 등의 소개서에 'FOOD THAT HEALS', 'MAKE FOOD DO GOOD' 등 약식동원과 관련한 표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채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채식주의자를 공략하면 특정 타깃의 사람만 반응하고 저변을 확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비전의 영향력이 좁아집니다. 비전 실현을 위해 굳이 채식을 강조할 필요가 없기에 채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덜어낸 것입니다.

루벤 샌드위치, 포케, 뇨끼 등 익숙한 메뉴를 그림과 함께 설명해 채식에 심리적 거리감을 좁힙니다.

채식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려는 노력은 메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단순히 갖가지 채소를 날 것으로 혹은 데쳐 내놓는 뻔하고 지루한 메뉴가 아니라 치킨, 롤, 만두, 포케 등 이미 익숙한 육식 메뉴에서 재료만 채소로 바꿉니다. 이를테면 '팝콘 치킨'은 닭고기를 버섯으로 대체하고, '드래곤 마키 롤'은 장어를 가지, 캐슈넛, 적양배추 등으로 대체하는 식입니다. 메뉴판에도 일일이 그림을 그려두어 생소한 느낌을 덜어줍니다. 여기에 뉴욕 스타일 샌드위치, 반 세오 등 베트남 음식, 마끼나 롤, 교자 등의 일식, 하와이안 포케, 이탈리안 파스타 등 다양한 국적의 요리를 채식으로 맛볼 수 있어 선택폭이 넓습니다. 디저트와 음료까지 수십여 종을 구비해 채식 때문에 메뉴가 제약되는 부분을 최소화했습니다.

닭고기 대신 버섯을 튀긴 팝콘 치킨은 단면을 잘라 보아도 마치 닭고기의 흰 살처럼 보이고 결대로 찢어집니다.
장어 대신 가지, 캐슈넛, 적양배추로 속을 채운 우나기 마키 롤입니다. 생각지 못한 재료로 장어의 식감을 살렸을 뿐 아니라, 입 안이 텁텁하지 않아 청량한 느낌마저 줍니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세 번 놀랍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메뉴와 비슷한 비주얼에 한 번 놀라고, 육류의 쫄깃한 식감을 구현한 것에 두 번, 채식이 자아내는 고유한 맛에 세 번 놀랍니다. 메뉴 이름이 같을 뿐 재료를 바꾸고 색다른 조리법을 적용해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메뉴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채식이라고 하면 풀색과 씁쓰름한 맛만 떠올리던 사람들로 하여금 채식에 대한 지평을 넓혀줍니다. 채식 치고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채식 여부와 상관없이 맛있고 더 나아가 채식이기에 가능한 맛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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