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감각이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까 • 오르에르

Aug 26, 2021
개인의 감각이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까 • 오르에르

2018년 3월. 전 세계 패션업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루이비통이 스트리트 브랜드 오프 화이트의 수장인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를 루이비통 남성복 아트 디렉터로 발탁한 것이죠. 스트리트 웨어 기반의 흑인 디자이너를 등용한 건 1854년에 루이비통이 설립된 이래 처음입니다. 루이비통은 왜 버질 아블로를 선택했을까요?

버질 아블로는 "100년 이상 된 브랜드를 12살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내가 그 일에 전문이다."라고 힘있게 말합니다. 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을 이종 교배하고, 패션, 건축, 가구, 음악의 경계를 허물면서 말입니다. 고전적인 럭셔리에서 벗어나 현대적으로 체질 개선하려는 250살 루이비통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입니다. 이제 버질 아블로는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불릴 정도니까요.

40달러짜리 폴로 셔츠에 프린트만 더해 550달러에 판매한 그의 첫 번째 브랜드 '파이렉스 비전'(좌). 상표만 붙었을 뿐인데 가격이 치솟는 럭셔리 브랜드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오프화이트(우)에서 그 기치를 이어갑니다. ⓒ오프 화이트
나이키와 협업한 오프 화이트의 더 텐 시리즈. 주황색 케이블 타이와 헬베티카 폰트가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버질 아블로는 건축학도의 면모를 살려 주황색 케이블 타이, 사선 줄무늬, 화살표 등 건설 현장에서나 볼 법한 디자인을 시그니처로 삼는 등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나이키

버질 아블로의 행보는 이미 개인의 범주를 뛰어넘었어요. 그들만의 리그였던 럭셔리 패션 산업에 '예술과 패션의 대중화'라는 화두를 던지고, 사업적 성과로 증명하며 산업 전체에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탁월한 센스를 철저히 비즈니스로 연결했기에 반짝 스타에 그치지 않고 더욱 지속 가능해졌습니다. '감각 자본의 시대'를 대표하는 사례입니다.

2018년 최고의 쇼로 평가되는 루이비통 2019 S/S. 흑인 래퍼를 모델로 세우고, 팝 뮤직을 틀고, 학생들을 게스트로 초대했습니다. ⓒGETTY IMAGES

하지만 개인의 취향과 감각이 탁월한 것과 이것을 성공적인 비즈니스로 안착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특정 개인에 의존도가 높다는 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까지만 성장하는 한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패션업계야 디자이너의 취향과 감각을 대량생산하는 체계가 꽤 자리잡혀 있지만, 다른 업계는 아직 사례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취향 좋은 개인은 그저 소박한 자아 실현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요?

김재원 대표가 운영하는 성수동의 카페 겸 편집숍 '오르에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김재원 대표는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고야마는 수집광으로 유명해요. 관심 있는 분야별로 가지고 싶은 물건의 나라, 연도, 히스토리, 작가, 사진, 가격 등을 엑셀에 정리하고 가장 인상 깊은 하나의 물건을 사 모으는 게 일상입니다. 꽃무늬, 지우개, 커틀러리, 심지어 돌멩이까지 수집 대상도 가지가지. 그렇게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넣고 나니 그만의 취향과 감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경지에 이릅니다.

ⓒ오르에르

공간의 생명이 점점 짧아지는 요즘, 그의 안목을 오롯이 담은 다섯 개의 공간(자그마치, 오르에르, 포인트 오브 뷰, 오드 투 스윗, WxDxH)은 수년째 성업 중이에요. 빼어난 안목의 공으로만 돌릴 게 아닙니다. 못지 않은 안목을 가지고도 스러져간 공간이 수도 없이 많거든요. 알 만한 사람만 찾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이 공간의 남다름에 공감하게 만들고, 큰 기복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개인의 감각을 어떻게 비즈니스로 안착시켰는지에 집중해 이중 가장 규모 있는 공간인 오르에르를 탐방하려 합니다.

공간의 조각을 모으다

오르에르는 외관의 앞뒤가 달라요. 앞모습은 붉은 벽돌의 상가지만, 뒷모습은 정원이 딸린 옛날 가정 주택입니다. 앞뒤뿐 아니라 층별로도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집니다. 1층이 이야기하기 좋은 카페였다면, 2층은 조용히 생각하기 좋은 공간이고, 3층은 전시 공간이자 편집숍입니다. 외관만 다른 게 아니라, 내부도 층별로 앞뒤가 구분됩니다. 심지어 2층 후면부에는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가 숍인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조금씩만 움직여도 휙휙 바뀌는 풍경에 순간이동을 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오르에르의 앞
오르에르의 뒤

197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부터 제조 공장과 상업 공간, 주거 공간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1층의 전면부에는 가죽 매장 3개, 후면부에는 원룸 3개로 구성되어 있었고요. 2층은 구두 공장으로 쓰였고, 3층에는 건물주가 살았던 가정집이 함께 있었어요. 오르에르는 건물의 전면부와 후면부를 트고, 후면부 정원으로 바로 이어지는 길을 뚫었습니다. 이 복합적인 구조를 십분 살리면서 하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애초에 이곳을 눈여겨봤다는 것 자체가 탁월한 감각의 영역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적인 접근'이라고 느끼는 지점을 좀 더 파헤쳐보면요. 공간의 조각을 모아 이곳에만 존재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가장 차별적인 부분이에요. 단일 공간일 때보다 조각이 여러개일수록 훨씬 고유함이 커지는 거죠. 어떤 조각을 합치느냐에 따라서 고유함이 곱하기로 증가하니까요. 단지 카페, 편집숍, 문구점 등으로 구성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같은 구성이더라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고 지역성이 뚜렷한 공간을 재활용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시적인 차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도, 디테일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아도, 오르에르의 남다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 개층만을 활용해 운영에 제한이 있던 자그마치 ⓒ자그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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