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보다 싼 헌책이 없는 헌책방 • 피터 해링턴

May 26, 2021
정가보다 싼 헌책이 없는 헌책방 • 피터 해링턴

헌책이라고 다 같은 헌책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버텨내거나 유명 인사의 흔적이 남은 헌책은 희소 가치가 생깁니다. 동일한 내용의 새책과 경쟁하는 헌책과는 다릅니다. ‘피터 해링턴’은 이러한 속성을 영리하게 사업화했습니다.

누구도 책에 관심이 없는 마을에서 헌책방을 연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망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헌책방은 물론이고 쇠락해가던 마을까지 살린 능력자가 있습니다.

탄광촌인 헤이온와이(Hay-on-Wye)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는 옥스포드 대학(University of Oxford)을 졸업한 후 1962년에 선망받던 런던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앞날이 깜깜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석탄 수요가 줄어들면서 폐광촌이 된 마을을 헌책으로 살려보겠다는 뜻을 품은 것입니다. 누구나 수군댈 만큼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는 보란듯이 헌책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1,5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에 이제는 40여 개의 헌책방이 들어섰고, 헌책을 사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아옵니다.

주민들의 입방아를 이긴 건 애서가들의 입소문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방서 건물을 헐값에 사서 헌책방으로 만들고 책을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헌책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생겼고, 헤이온와이에 가면 희귀본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입소문의 힘을 확인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발 없는 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입소문이 날 만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냅니다.

소방서를 헌책방으로 변신시킨 데 이어 1971년에는 마을의 상징인 헤이 성을 매입해 헌책방으로 꾸밉니다. 성을 서점으로 바꾸는 것도 흥미로운 시도지만, 그는 더 화제가 될 만한 아이디어를 선보입니다. 헤이 성의 돌담을 따라 책장을 설치하고 ‘정직 서점(Honesty Bookshop)’을 연 것입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정직 서점에는 직원이 없습니다. 심지어 가격표도 없습니다. 고객들이 헌책을 집어들고 알아서 가격을 매겨 요금함에 넣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서점입니다. 컨셉 자체도 신선하고, 돌성을 배경으로 한 서점 사진도 낭만적이어서 헤이온와이가 본격적인 유명세를 얻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1977년의 만우절에는 헤이온와이 왕국의 독립을 선포하는 이벤트를 엽니다. 만우절 행사이지만 꽤나 진지하게 접근합니다. 그가 왕관을 쓰고 직접 서적왕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은 기본이고, 왕국의 독자적인 화폐와 여권 등도 발행합니다. 상상력을 말로만 풀어낸 게 아니라 현실에 구현해낸 덕분에 애서가들의 관심을 끕니다.

그가 뿌린 화젯거리로 헤이온와이가 책마을로 자리를 잡아가자 이번에는 마을 전체가 이야깃거리를 생산합니다. 헤이온와이는 1988년부터 매년 5월경 10여 일 간 ‘헤이 페스티벌(Hay Festival)’을 주최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을로 불러 모읍니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방송인 등이 참석해 축체를 빛내며 책읽기 행사뿐만 아니라 음악, 전시, 거리 퍼포먼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펼쳐집니다. 이 기간 동안 1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마을을 찾습니다. 매년 입소문을 확산해내는 이 축제 덕분에 헤이온와이는 애서가들이라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성지로 자리매김합니다.

책을 사랑하는 퇴사준비생이라면 런던을 여행하는 김에 헤이온와이를 둘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문제는 마을의 위치입니다. 런던의 패딩턴(Paddington) 역에서 웨일스의 헤리포드(Hereford) 역까지는 기차를 타고 3시간 정도 가야 하며,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들어가야 합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무리인 일정입니다. 그렇다고 헌책을 향한 애정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런던에는 또 다른 형태로 낭만을 채워줄 ‘피터 해링턴(Peter Harrington)’이 있습니다.

새책을 파는 듯한 헌책방

헌책방의 풍경은 헌책과 닮아 있습니다. 유럽의 헌책방들은 빛바랜 책처럼 어딘지 모르게 낡아 있고, 잉크냄새 대신 책내음이 그득합니다. 또한 목차가 찢어진 헌책마냥 서가에는 책들이 순서를 모르고 더미로 쌓여 있거나 빼곡하게 꽂혀 있습니다. 시간을 잃은 듯한 분위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보통의 서점에서 살 수 없는 책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애서가들은 헌책방을 갑니다. 표기된 책가격보다 싸게 구매하는 건 덤입니다.

피터 해링턴 첼시점 매장 전경입니다.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볼 법한 거대한 깃발로 옆간판을 달았습니다.

피터 해링턴에서도 헌책을 팝니다. 하지만 보통의 헌책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니다. 우선 간판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의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볼 법한 거대한 깃발로 옆간판을 달았습니다.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도 차이가 느껴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새책이라곤 새로 나온 헌책을 소개하는 책자 정도밖에 없지만 매장 안은 새책을 파는 서점처럼 보입니다. 책을 추천하듯 책표지를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택하기도 하고, 책을 빼곡하게 꽂아 놓기보다 차곡하게 꽂아 놓아 정돈된 느낌을 줍니다. 심지어 누가 책을 집어가더라도 눈감아줄 것만 같은 여느 헌책방의 분위기와 달리 지하층이나 위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가방을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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