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책을 햇빛에 그을려 문구 마니아를 줄 세운 종이 가게 • 핀모량항

May 27, 2021
공책을 햇빛에 그을려 문구 마니아를 줄 세운 종이 가게 • 핀모량항

햇빛이 싹 틔우는 건 새싹만이 아닙니다. 타이베이의 '핀모량항(品墨良行, Pinmo Pure Store)'에서는 햇빛이 글자마저 피어나게 합니다. 글자가 피어나는 곳은 땅이 아니라 공책입니다. 핀모량항에서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무지의 공책을 판매합니다. 겉보기에는 재생지로 만든 평범한 공책 같습니다. 하지만 공책을 햇빛에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글자가 생겨납니다. 게다가 그 글자는 나만을 위한 특별한 것입니다. 이 공책의 신비함과 특별함에 반해 사람들이 핀모량항으로 모여 듭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공책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대만의 유명 문구 블로거 타이거(Tiger)가 운영하는 지우샹호원쥐(直物生活文具, Plain Stationery & Homeware)는 문구 덕후들의 성지입니다. 문구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과한 디자인이나 기능을 가진 문구들은 배제하고, 문구의 본질을 살린 제품들을 큐레이션합니다. 소장가치가 있는 문구, 중고 디자인 문구 등도 갖추고 있으며 진열된 문구마다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출시연도와 함께 전시합니다. 지우샹호원쥐의 1호점은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문구에 대한 애정과 전문성만큼은 작지 않습니다. 마니아가 운영하는 마니아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지우샹호원쥐의 매장 전경입니다.

문구 마니아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지우샹호원쥐는 타이베이 중샤오신성역 근처에 2호점을 오픈합니다. 1호점과 달리 매장 옆에 카페를 함께 운영하며 커피, 차, 딤섬 등 간단한 식음료를 함께 판매합니다. 2호점의 카페는 추가 매출을 올리는 역할도 하지만 지우샹호원쥐의 고객들끼리 편안하게 대화하고 서로가 가져온 문구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려는 목적이 큽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아지트가 되어 점차 유명세를 타자, 문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지우샹호원쥐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인기입니다. 마니아들을 시작으로 고객층이 확장된 것입니다.

각종 문구류와 카페 공간이 함께 있는 지우샹호원쥐의 매장입니다.

종이도 문구와 비슷하게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이가 종이처럼 보이지만 세분화된 취향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종이의 종류를 무게, 질감, 색상 등의 기준으로 구분하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집니다. 지우샹호원쥐처럼 전문성을 바탕으로 종이에 대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자극하며 종이 가게를 시작할 수도 있으나, 타이베이 융캉제에 위치한 '핀모량항(品墨良行, Pinmo Pure Store)'은 처음부터 애호가들을 타깃하기보다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이 가게를 먼저 오픈한 후에 전문성을 갖춘 종이 연구소를 열며 역주행을 합니다.

종이가게인 핀모량항 1호점입니다.
종이연구소인 핀모량항 2호점의 간판입니다.

1호점: 모르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종이 가게

핀모량항의 '썬 태닝 프로젝트(Sun Tanning Project)'는 핀모량항을 대표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상적이면서 자연적인 요소인 태양과 종이만으로 감각을 자극하고 자연과 행위의 가치를 제고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취지는 철학적이지만, 과정은 감성적입니다. 종이를 햇볕에 노출하면 누렇게 변하는 현상을 활용해 공책의 표지를 디자인합니다. 검정색으로 날짜가 적힌 투명비닐이 공책을 감싸고 있어 비닐을 씌운 채로 햇볕에 놔두면 날짜가 적힌 부분을 제외한 종이가 누렇게 변합니다. 비닐을 제거하면 날짜 부분만 빛에 바래지 않아 날짜가 드러납니다. 표지의 날짜는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든 날짜가 있어, 자신의 생일에 해당되는 날짜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품 이름이 '생일 공책'입니다. 누구나 365일 중 하루는 생일이기 때문에 생일 공책이라는 컨셉은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입니다. 게다가 잉크를 사용하지 않고 종이와 햇빛만을 이용해 글씨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잔잔한 재미를 느끼고, 종이의 고유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썬 태닝 프로젝트의 생일 공책입니다. 공책을 감싸고 있는 비닐에 검정색 잉크로 날짜를 써서 공책을 햇빛에 노출시켜도 날짜 부분만 변색되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책이 변색되는 정도를 보여 줍니다. 약 8일이면 썬 태닝 프로젝트의 생일 공책이 완성됩니다.
썬 태닝 프로젝트의 생일 공책에는 365일 모든 날짜가 있어 누구라도 자신의 생일에 해당되는 날짜를 고를 수 있습니다.
방문하는 한국인 고객들을 위해 썬 태닝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한글로 적어 두었습니다. 투박한 번역마저 정감이 듭니다.

핀모량항 1호점에 있는 또 하나의 재미 요소는 DIY 공책입니다. 종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종이를 쉽게 선택하고 공책을 직접 만드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제본까지 고객 스스로가 한다는 점에서 맞춤형 노트 제작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게들과 다릅니다.

DIY 공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제본방법, 사이즈, 종이를 고릅니다. 5가지 제본방법과 3가지 사이즈는 견본이 마련되어 있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종이의 종류도 촉감, 색깔, 투명도 등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준으로 구분해 두어 선택이 어렵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선택이 끝나고 나면 공책을 꾸밀 장식을 고릅니다. 모든 장식들은 핀모량항에서 수제로 말린 꽃, 과일 등의 자연 소재로 구성되어 있어 종이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어 줍니다. 필요한 재료들을 고른 후에는 매장 한 켠에 마련되어 있는 작업 공간에서 실, 바늘, 미싱 등을 이용해 직접 공책을 만들면 됩니다. 자신만의 공책을 만드는 재미 덕분에 사람들과 종이는 한층 더 가까워집니다.

1호점 매장 한 켠에는 DIY 공책을 만들 수 있는 작업 공간이 있습니다.
DIY 공책을 만드는 방법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함께 안내되어 있습니다.
DIY 공책을 장식할 수 있는 자연 소재들입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애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애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설프지만 고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품에 따라서는 전문가가 만든 완제품을 구매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 비싼 돈을 주고도 자기만의 것을 직접 만들기도 합니다. 게다가 만드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겁고 창의적인 과정입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다이어리, 노트 등의 종이 제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종이를 고르는 등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것을 만들면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품보다 특별한 의미가 생깁니다. 핀모량항 1호점에서는 종이의 매력을 조명하는 아이디어와 직접 만드는 재미로 종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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