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에 있는 와이너리 • 로버슨 와인

May 26, 2021
도심 한복판에 있는 와이너리 • 로버슨 와인

런던의 날씨는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런던과 와이너리는 낯선 조합입니다. 그렇다면 런던에선 와인을 수입해서만 마셔야할까요? ‘로버슨 와인’은 통념을 깨고 런던에 포도밭에서 해방된 와이너리를 만들었습니다.

1976년,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이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서 최고의 와인을 선정하기로 한 것입니다. 보통 ‘계급장 떼자’는 표현은 약자들의 언어입니다. 실력은 있는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때 공정하게 겨루자고 도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에서 먼저 제안을 했습니다. 근본없이 치고 올라오는 미국 와인이 눈엣가시였고, 한번 제대로 눌러 주려고 기획한 이벤트였습니다. 그만큼 질 리가 없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비해 프랑스인으로만 심사위원단을 구성하고, 홈그라운드인 파리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등 판을 편파적으로 짰습니다. 결과가 뻔한 싸움이라 기자들도 취재를 거절할 정도였습니다. 마침 근처니 공짜 와인이나 마시자는 심산으로 단 1명의 기자만 참석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와인잔을 비웠던 그 기자는 와인 업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 올 특종을 따냅니다. 이름하여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 프랑스 심사위원들은 프랑스 와인을 구별해 내지 못하고, 레드와 화이트 와인 모두 미국산 와인에 최고점을 주고 맙니다. 특히 화이트 와인의 상위 랭킹은 미국산이 싹쓸이하다시피 합니다. 와인계의 견고한 유리 천장에 금이 가면서 현장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최정상급 와인을 만드는 ‘테루아르(Terroir)’가 오직 프랑스에만 있다고 여겼는데, 인정해야 할 테루아르가 일순간 넓어진 것입니다.

  • 테루아르: 와인을 재배하기 위한 여러 조건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주로 자연 환경을 가리키지만 재배, 양조 방식 등 양조자의 특성까지 포함한 포괄적 의미로도 쓰입니다.

여기엔 미국의 실험 정신이 한 몫을 했습니다. 프랑스 와인은 수백 년 동안 검증에 검증을 거친 전통 양조법으로 만들어지는지라 과감한 시도에 인색합니다. 반면 미국은 전통이나 규제가 약해 미국의 테루아르에 어울리는 양조법을 원점부터 찾아갔습니다. 효모, 교배, 온도 조절, 발효 등에 있어 적극적으로 기술 연구를 하며 품질을 끌어올린 것입니다. 파리의 심판 이후 소비자는 물론 생산자의 인식도 바뀌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호주, 칠레 등 신대륙의 와이너리도 탑클래스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잠재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됩니다.

30년 후인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을 기념해 ‘런던의 심판’을 열었습니다. 파리의 심판 때 만들어진 똑같은 와인으로 승부하되, 4명의 영국인, 1명의 미국인, 4명의 프랑스인으로 심사위원단을 구성해 공정성을 더했습니다. 프랑스 와인은 오래될수록 깊은 맛을 내기에 이번엔 프랑스의 승리가 유력하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하지만 ‘런던의 심판’도 미국 와인에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내심 ‘아무리 그래도 와인은 프랑스지’하며 다시 경직되려던 와인업계가 경각심을 되찾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절대강자의 타이틀이 사라진 와인 업계에서 또다시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또 다른 런던의 심판을 기다리는 와이너리가 있습니다. 영국 최초의 어반 와이너리(Urban winery) ‘로버슨 와인(Roberson Wine)’입니다.

선입견에 도전장을 내민 와이너리

로버슨 와인은 런던 지하철 노선도의 1존에 있습니다. 런던 중심부인 피카딜리 서커스(Picadilly Circus)에서 지하철로 20분 걸리는 거리입니다. 와이너리라고 하면 교외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가까워도 너무 가깝습니다. 금방 갈 수 있는 장점은 있지만 보통의 와이너리와 달리 이 곳에선 광활한 포도밭을 볼 수는 없습니다. 로버슨 와인은 와인을 만들기만 할 뿐, 포도를 재배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와인을 대량으로 생산하지 않고 소규모 양조장에서 매년 1,000여 개의 와인만 만듭니다. 대신 와인의 맛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합니다. 2013년에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4년 만에 IWC(International Wine Challenge)로부터 3개의 은상과 1개의 동상을 수상했고, 특히 바쿠스(Bacchus) 와인 부문에서는 최고 득점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와인 대회에서 맛을 증명했지만, 영국산 와인에 대한 선입견은 바꾸기 어렵습니다. 영국은 비가 잦아 포도를 재배하기 어려운 환경을 가진 까닭에 와인 생산 강국은 커녕 세계 최대의 와인 수입국입니다. 전 세계 최초로 와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마스터 오브 와인(Master of Wine)을 설립하고, IWC, DWWA(Decanter World Wine Awards)와 같은 와인 대회를 크게 여는 등의 노력을 통해 또 다른 영역에서 와인 강대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생산에서만큼은 열세의 위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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